‘걷기’와 ‘철학’. 조금은 연결짓는 게 낯선 이 조합이 로제 폴 드루아는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전제하고, 전개하고, 또 결론짓는다. 드루아는 ‘걷기’란, 특히 인간이라는 종(種)의
단독파생형질인 ‘두발로 걷기’란 매우 불안정한 것이어서 일단은
추락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추락을 저지하고, 혹은
추락을 저지하기 위해서 재빨리 다음 발을 앞으로 내밀고, 다시 추락의 위기에서 다시 한 발을 내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인간이 안정적인 자세에 만족했다면 이 불안정한 두 발로 걷기라는 놀라운 발명품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과학적 설명은 좀 다를 수 있다). 철학도 다를 바 없다는 게 드루아의 주장이다. 철학 역시 영혼의 평온을
거부하고, 문제를 끄집어 내는 데서 시작된다. 질문을 하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진다.
그렇게 비틀거리다가 자세를 바로잡지만, 다시 질문을 던지며 비틀거린다. 그렇게 정신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걷기와 철학은 서로 은유한다. 걷기와 관련된, 많은 철학자들을 소개한다. 어떤 철학자는 정말 걷기와 철학하기를 거의 동일선상에 놓았던 철학자도 있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서나 칸트, 티야나의 아폴로니우스, 루소, 니체 같은 이들이다. 그들의
철학을 걷기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자도 있다. 이를테면 붓다도 그렇고,
데카르트도 그렇고, 헤겔도 그렇다. 마르크스도
빼놓을 수 없다. 직접적 관련성을 갖거나, 은유적으로 관련성을 갖거나 할 것 없이 드루아의
관점에서는 철학하는 것은 걷는 것이다. 앞으로 걷는 것. 여기서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것은 소로에 대한 글에서 나타난다. 드루아는 소로의 걷기가 퇴행이라고 규정한다. 문화 밖으로, 문화에 맞선 걷는 것, 야생으로 들어가기 위해 걷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지독하고 위험한 악취를 풍긴다’고 쓴다. 드루아는 이른바 진보를 믿는다. 믿는다기 보다는 걷는다는 것의 본질은 빠르거나 느리거나 비틀거리거나 바른 자세이거나 모두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철학도, 뒤를 돌아볼지언정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칸트에 관한 중요한 에피소드가 문득 끼어든다. “그런데 어느 날, 기계가 고장 났다. 칸트가 여정을 바꾼 것이다. 그가 정신을 딴 데 판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었다. ... 이날,
그는 급히 신문을 사러 가야 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보편적 선언이 선포되었으며, 민중이 공화
체제를 쟁취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151쪽)- 칸트의 걷기를 멈춘 그것. 그것은 또 다른 걷기였던 것이다. 역사의 걸음. 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음악을 듣지 않으면서 걷는다. 매일매일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하며, 걸으며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연구 주제를 생각하며,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할 지를 구상한다. 내일은 누구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 지 가늠해보기도 한다. 이런 걸 철학이라고 할 수 없을 지 모르지만, 그래도 걷는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생각하는 것을 조금만 넓히면 철학이다.
걷는다는 것은 철학하는 것이다. 이제 그다지 낯설지 않다.
나는 걷는다, 고로 철학한다
고통의 순간에 오로지 걷고 또 걸은 니체 그리고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랭보까지
느리게 걷고 깊이 사유하며 자유롭게 살다간 이들의 이야기
철학적 행위이자 정신적 경험인 ‘걷기’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담은 책
걷기는 단지 한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에 내딛는, 일상적인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자연과 하나 되는 데서 오는 일치감과 충만함을 줄 뿐 아니라, 온몸의 감각을 두루 자극하고 머릿속을 신선하게 일깨워주는 걷기를 계속하다 보면 걷기는 하나의 삶의 자세, 하나의 철학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 특별한 기술이나 장비, 돈이 필요 없고 몸과 공간, 시간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걷기는 ‘속도의 시대’에도 그 느림의 미학과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프랑스 파리12대학 철학 교수이자 미셸 푸코 연구자로 잘 알려진 프레데리크 그로는 이 책에서 ‘걷기’라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보여준다. 그는 걷기를 철학적 행위이자 정신적 경험이라고 보고, 걷기가 우리 몸과 마음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우리 삶에 얼마나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걸으려면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을 취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고찰해나간다.
특히 이 책은 걸으며 사색하며 얻은 통찰력과 감수성, 영감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사상과 작품 세계를 형성해나간 철학자와 작가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만성적인 두통과 구토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알프스의 질스마리아를 걷고 또 걸으며 ‘차라투스트라’와 ‘영원회귀’의 착상을 떠올린 니체, 프랑스 샤를빌과 파리, 마르세유와 아프리카 사막 등지를 쉴 새 없이 오가며 ‘바람구두를 신은 인간’으로 불렸던 시인 랭보, 걸어야만 진정으로 생각하고 구상할 수 있다고 믿었던 루소, 건강을 유지하고 자신을 제어하는 훈련을 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산책에 나섰던 칸트, 우울과 광기 어린 걷기를 통해 비범한 작품을 창조해낸 네르발과 횔덜린 등 사상사와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의 삶에 걷기가 중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이 책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서 보여주었듯 어른이 된 후로도 삶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는 어린 시절의 산책, 발터 벤야민이 주목했던 대도시 파리의 아케이드를 거니는 소요逍遙, 성인聖人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 자체를 통해 믿음을 확고히 다지는 성지 순례 등 걷기가 자연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실로 다종다양한 행위를 아우른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걷기가 자연에서 얻는 충족감, 신선한 자극, 깨달음, 희열, 고통, 고독, 우울 등 갖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시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로 풀어냄으로써 걷기가 사유의 근육을 키워주는 하나의 철학임을 호소력 있게 주장한다.
1 걷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2 자유 ― 비트 제너레이션
3 나는 왜 이렇게 잘 걷는 사람이 되었나 ― 프리드리히 니체
4 바깥
5 느림
6 도피의 열정 ― 아르튀르 랭보
7 고독
8 침묵
9 산책자의 백일몽 ― 장 자크 루소
10 영원
11 야생의 정복 ― 헨리 데이비드 소로
12 에너지
13 순례
14 재생과 현존
15 견유주의자의 발걸음
16 평안한 상태
17 우울한 방황 ― 제라르 드 네르발
18 일상적인 외출 ― 이마누엘 칸트
19 산책 ― 마르셀 프루스트
20 공원
21 도시의 소요자 ― 발터 벤야민
22 중력
23 기본적인 것
24 신비론과 정치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25 반복
26 신의 은신처를 걷다 ― 프리드리히 횔덜린
27 세상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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