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를 읽은 이후 여우는 내게 매우 친숙한 동물이 되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애완용으로 한 마리쯤 길들여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바람에 넘실거리는 황금 밀밭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던진 간절한 호소 한 마디의 영향 때문이다. “저기 좀 봐. 밀밭이 보이지? 그런데 난 빵을 먹지 않기 때문에 내게 밀은 아무 소용이 없어. 그러니 내게 밀밭은 아무 의미가 없어. 슬픈 일이지! 그런데 네 머리는 금발이잖아. 네가 나를 길들이면 참 신나겠다. 저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거 아냐? 바람이 밀밭을 쓸고 지나가는 소리도 사랑하게 될 거야.” 생텍쥐뻬리의 <어린 왕자 중에서> 자신을 ‘길들여’ 달라는 여우의 간절한 호소가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그렇기에 어느 동화책에서든 난 여우를 접하게 되면 이 장면을 다시금 떠올린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네방네 소란만 일으키는 여우가 내 눈엔 달리 보인다. 그는 겉보기완 달리 마음을 나눌 친구가 필요했던 것 같다. ‘예의바르게’ 점잖 빼는 오리나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셔츠 선물을 거만하게 자랑하는 족제비가 아니라 연못에 첨벙첨벙 뛰어들어 이리저리 물을 튀기며 물장구치며 떠들썩하게 놀 수 있는 친구나 새 셔츠라도 진흙을 묻혀가며 함께 뒹굴 수 있는 친구 말이다. 꼭 그렇게 성격이 들어맞진 않더라도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늘 지켜봐주는 누군가를 내심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겉으론 ‘혼자가 어때서!’라고 말하지만 속으론 토끼가 자신을 부러운 듯 지켜보는 것을 싫어하진 않는 눈치다. 그래서 <어린 왕자>의 여우는 이 동화 속 여우와 오버랩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 내가 여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현실의 여우라는 동물이 좋아서가 아니다. 동화 속 여우라는 동물을 통해 전달된 그 메시지의 중요성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길들이기’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길들여진다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면서 이 말의 의미를 자꾸 되새김하다보니 자연스레 그 말을 전해준 동화 속 여우라는 동물에 대해서도 덩달아 좋아지게 된 것뿐이다. 따라서 정작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여우가 아니라 그가 전해준 ‘길들이기’라는 인생의 좌우명이다. 어릴 적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 곁에도 나를 잘 길들인 친구들만이 소중하게 남아 있다. 아무리 오랜 동안 곁에서 함께 지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지 않은 친구는 지금 곁에 없다. 아예 기억에서조차 지워진 경우도 많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무려 9년을 함께 한 친구인데도 어렴풋한 기억의 파편으로만 존재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다시 만난다면 곧바로 껴안고 눈물을 글썽일만한 친구들도 있다. 이런 차이는 ‘길들이기’의 효과에 다름 아니다. 이 동화도 이런 인생의 도식을 어린 독자들에게 가슴깊이 새겨준다. 천방지축 내 맘대로 살아가는 여우의 마음 한 구석에도 자신을 곁에서 지켜보는 토끼가 점점 자리 잡는다. 아무리 신경 쓰인다고 저리 가라 뿌리치지만 자신의 말썽꾸러기 행동을 지켜보는 토끼가 자꾸 눈에 들어오는 순간 시나브로 자신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켜켜이 쌓인 기억의 단편은 이제 토끼가 사라지는 순간 궁금증을 유발하게 한다. 자신의 장난도 그가 지켜보지 않으면 왠지 재미가 없고 시들해진다. 어느 순간 여우는 “봐도 돼!”라는 토끼의 말을 그가 현장에 없음에도 환상으로 떠올리며 “봐도 된다니까!”라고 혼잣말로 뇌까린다. 대답 없는 메아리에 “안 봐도 상관없어.”라고 마음을 다그치지만 허전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미 여우는 토끼에게 길들여져 버린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이리저리 사라진 토끼를 찾아 헤매다 드디어 그를 발견한 여우의 입에서 “너 어디 아파? 병이라도 걸린 거야?”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오게 된 것은 토끼에게 길들여진 여우의 모습을 아주 여실히 보여주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의 친밀성이 여기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스승과 제자, 상사와 부하 직원, 친척 간, 이웃 간, 심지어 가족 간에도 예외가 아니다. 가족도 피로 맺어진 유전적 관계가 아니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관계성의 문제이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지극 정성으로 살피고 보듬어주는 과정이나 형과 누나가 동생을 지켜보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그런 관계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리 혈연적으로 맺어진 사이라 하더라도 필시 사이는 틀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가족 관계는 이미 가족의 본질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에 허울뿐인 가족이 되리라. 따라서 이 짧은 동화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준다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봐도 돼!”라는 말에 스스로 장벽을 쌓고 “안 돼!”라고 외치면 안 되리라. “봐도 된다니까.”라고 누군가를 내 삶의 세계에 초대하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이런 동화책을 아이들과 함께 자주 읽어야 하리라. 이 동화가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게 된 것은 이런 내용도 내용이지만 동화를 구성하고 있는 외적 요소들도 한 몫 했다. 우선 캐릭터의 선정에 매우 공감이 간다. 주요 캐릭터인 여우와 토끼는 물론이고, 조연으로 등장하는 오리나 족제비 등도 세심하게 배려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딘가 모르게 촐랑댈 것 같은 여우는 동화 속에서 자신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늘 말썽꾸러기로 남아 있는 캐릭터다. 아마도 아직 장난기 그득한 어린 독자들 사이에 가장 공감이 가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반면 소심한 토끼는 그런 여우가 부럽기만 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늘 불안한 듯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여우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캐릭터다. 장난기 가득한 여우가 부러우면서도 정작 자신은 거기에 동참하지 못한다. ‘봐도 돼!’만을 연발하며 항상 여우 곁에 머물러 있으면서 어린 독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심성을 지녔기에 어린 독자의 내면에 잠재된 착한 본성을 솟구치게 하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오리는 어떤가? 지상에서는 뒤뚱뒤뚱 걸어 다니고 물속에서는 우아한 자태로 헤엄치는 게 오리다. 마치 뒷짐 지며 배를 앞으로 내밀고 거만하게 걸어가는 조선 시대 양반님을 연상시킨다. “예의 바르게”를 외치는 동화 속 오리에 딱 맞아떨어진다.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어릴 적 시골에서 자주 본 족제비는 사람을 보고 순간 멈칫 하다가도 몸을 곧추세우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모습이다. 꼭 날씬하고 유연한 몸을 자랑이라도 하는 자태였다. 눈부신 새 옷을 입고 거만한 자세로 여우의 장난기를 촉발시키는 동화 속 족제비를 연상시킨다. 이런 세심한 캐릭터의 배치가 동화의 내용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둘째로 동화에 삽입된 삽화의 효과다. 흑백과 칼라를 적절히 배치하여 색상만으로 글의 분위기에 젖어들게 한다거나, 정말 내용에 딱 맞게 삽화를 그려 넣어 주인공들의 내면을 그림만으로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갑자기 일주일이나 종적이 묘연한 토끼를 걱정하며 걸어가는 여우의 등 뒤에서 속절없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하루 해. 그로 인해 형성되는 자신의 긴 그림자를 바라보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여우의 모습은 그 그림 한 장면만으로도 어린 독자에게 여우의 심정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아예 글 없이 그림만으로 두 쪽 전면을 가득 채운 것 같다. 여러 말을 통해 여우의 애타는 심정을 전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란 생각이 든다. 또한 다음 장면부터는 사라진 토끼를 걱정하며 이리저리 허둥지둥 뛰어다니는 여우의 행동을 주로 가는 세로선을 이용해서 표현하거나 시커먼 색상으로 처리하여 극적 긴장감을 극도로 고조시킨다. 그러다 나무 그루터기 구멍 안에서 새알을 따뜻하게 가슴에 품고 있는 토끼를 발견한 여우의 마음은 한 순간에 완전히 이완된다. 당연히 그림은 다시 시커먼 검정색에서 밝고 보드라운 누런빛으로 바뀐다. 그렇다고 그림이 여러 가지 다양한 색상으로 아이들의 눈을 현혹하진 않는다. 주로 어두운 검정 계통과 밝은 갈색이나 노랑 계통의 색상을 글의 내용에 따라 배치한 것뿐이다. 그 배치가 매우 적절하여 어린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동화의 내용에 더욱 흠뻑 젖어들 게 된다. 셋째로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질문으로 삽입된 “봐도 돼!”라는 문구의 효과이다. 이 짧은 문구가 묘한 호기심을 자극함은 물론이고 글 전체에 리듬감을 주는 효과가 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아이들은 그 동화를 대표할 만한 리듬감 있는 단어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동화 구연 방식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동화 자체가 의성어나 의태어, 혹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짧은 문구를 적절히 배치해놓으면 아이들은 그것을 유행어처럼 따라한다. 어린 조카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봐도 돼!”라는 말의 효과를 실감한다. 조카는 고모부의 그다지 변변찮은 동화 구연 솜씨에도 “봐도 돼!”라는 부분에서는 귀를 쫑긋 세운다. 그러다보니 나도 자연스레 그 부분에서 목소리의 톤이 높아지며 약간 장난기 서린 구연에 도전도 해본다. 그래선지 “봐도 돼!”를 연발하며 여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토끼에게 관심을 집중하던 조카는 종국에 여우가 그 말을 토끼에게 토해내자 더욱 흥미를 보이며 재밌어 한다. 얼굴에 살짝 미소가 머금는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지만 오히려 때 묻은 어른의 영혼을 정화하는 책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비록 조카를 위해 구입한 책이지만 서서히 묻혀가는 내 마음의 동심을 자극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책들보다 이런 창작 동화가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잃어버린 동심을 자극하는 동화책을 통해 어린 영혼과 만나는 것만큼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도 드물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조카에게 자주 책을 선물하는 편이다. 그냥 던져주기 보다는 함께 읽는 편이 훨씬 좋다. 그것이 세파에 찌든 내 영혼을 치유하는 방법이면서 그와 내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가 나를 진심으로 찾길 바라는 마음도 내포되어 있다. 아무튼 아직까진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듯하다. 다른 누구보다 그 어린 녀석이 내게 안기길 좋아하고 내 손을 잡고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하니 말이다. 무엇보다 동화책을 들고 와 읽어달라고 자꾸 조르니 말이다.
말썽쟁이 여우와 부끄럼쟁이 토끼의 서로의 마음을 두드리는 용기 있는 질문 네 마음을 봐도 돼?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예의 바른 어린이’가 되어 주길 강요합니다. 반찬 투정을 하지 않고 골고루 맛있게 먹는 어린이, 상냥하게 웃으며 배꼽 인사를 하는 어린이, 공손한 말투로 크게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어린이. 하지만 모든 어린이들이 어른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어린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격도, 능력도, 생각도, 기쁨도, 슬픔도, 꿈도 모두 다 다르기 때문이에요. 이 동화의 숲 속 마을 역시 아이들에게 ‘예의 바른 어린이’가 되기를 강요합니다. 헤엄을 칠 때도 물을 튀기면 안 되고, 뛰어들면 안 되고, 우아하게, 아름답게, 조용하게 헤엄쳐야 예의 바른 어린이입니다. 토끼가 왜 물에 들어가지 못하는지, 여우는 왜 물에 풍덩 뛰어드는지, 아이들의 속마음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오리의 가르침대로 동작 하나 틀리지 않고 헤엄을 치는 너구리는 좋은 어린이이고, 소심한 토끼와 장난꾸러기 여우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썽꾸러기들입니다. 하지만 아롱이다롱이 다른 아이들에게 모두 우아한 백조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동화는 묻습니다.
예의 바르게
따라오지 마
네 맘대로 해
혼자가 어때서!
봐도 된다니까
정말 봐도 돼?